5호 - Unlabelable Sen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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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2024/9/6 00:00
『펨텍톡(FEM TECH TALK)』은 기술 문화를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보고 이를 현재의 이슈와 연결해 보는 기술 비평 진(Zine)을 지향합니다.
이번 호의 주제어 ‘Unlabelable Senses’는 생김새에서 빽빽한 세로획과 같은 문자열의 반복이 두드러집니다. 쪼개어 보면 간단한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는 이 말은 쉽게 구분 짓고 이름 붙이기 어려운 논리와 감각들, 곧 이번 호의 주제인 ‘감정’을 가리킵니다. 사방에서 사람들에 감정형과 사고형이라는 큼직한 라벨을 수여하느라 바쁜 가운데, 감정 자체를 다뤄온 기술의 태도를 뜯어봅니다.
시작은 인공지능 산업이 만들어냈다는 대표적인 노동인 데이터 라벨링에 임해온 문지호의 고찰입니다. 첨단과 이성을 한 데 묶어온 이들이 지금껏 무엇을 누락할 수 있는 감정으로, 다시 말해 낙후된 과거로 여겨왔는지 탐색합니다. 이에 맞서는 설득력 있는 목소리들도 만나봅니다. 이어지는 Iris Hagel의 글은 삶이 소셜 미디어의 프레임을 깊게 경유하면서 생겨나는 매일의 균열을 회고합니다. 카메라의 설정을 다룰 때 노출이 과하면 결과물이 타버리듯, 끊임없이 노출되는 자아가 겪는 변화를 통해 우리의 현재를 돌아봅니다.
매호 연재되는 편집자 전유진의 기술 에세이는 이 순간에도 모두의 몸속에서 미세한 전류가 번쩍인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전기 기술을 다루는 경험이 세계에 대한 감각과 이해로 이어지는 흐름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배채연의 글 ‘김양에게’는 독자들을 가까이 끌어당겨, 거짓말탐지기 폴리그래프의 역사를 조명합니다. 감정과 기술이 맺는 관계에 대한 앞선 글들의 문제의식을 구체적으로 증폭해 보는 읽기가 될 것입니다.
매호 소개하는 CCC의 이번 챕터는 컴퓨터과학과 맞물리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분야들을 직접 짚으며 각 학문과의 접점을 다룹니다. 여느 챕터와 같이 실질적인 컴퓨터과학 교육법과 질문거리가 담겨 있습니다. 마지막 순서인 십자말풀이 ‘(넌) 센스 퀴즈’에서는 기분, 정동, 기술을 한 데 놓고 말하다 보면 튀어나올 법한 단어들을 모았습니다. 문제 풀이의 사색에 이따금 검색을 곁들여도 좋을 만한 힌트들을 수록했으니, 즐겁게 몰두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작년 초 창간된 「펨텍톡」은 어느덧 마지막이 될 다음 호를 앞두고 있습니다. 편집부는 의견과 비판을 비롯한 모든 피드백을 환영하니 어떤 감상이든 거리낌 없이 부쳐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부디 이번 호는 주제에 어울리게 다분히 ‘감정적’으로 읽어주시기를 바라며, 독자 여러분의 너른 관심과 참여를 기다립니다.
2024년 가을 펨텍톡 편집자 이다솜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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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들 - 문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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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다노출 : 기술적 슬픔, 과잉 촬영, 기억 상실 - Iris Hag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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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신체 → 감각 → 감정, (+ 기술) - 전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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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김양에게 - 배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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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Critically Conscious Computing : CS + Humanities + Social Sciences - Amy J. 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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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말풀이) (넌) 센스 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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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에게
배채연
당신의 죽음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강군의 말에 따르면 1978년 4월 8일, 군산에서 당신이 스스로 옷을 모두 벗었다죠. 회사 경비원이 없는 틈을 타 백화양조에 들어가서 강군은 당신의 남자관계를 추궁했고, 당신이 “나는 너 이외에는 사귀는 남자가 없다”며 결백을 보이기 위해 옷을 벗었다고요. 당신이 실신했을 때 강군은 당신을 술통에 넣었습니다. 강군은 백화양조 계열사의 사장 아들이었지요.1 김양, 옷을 벗으며 결백을 주장했다는 당신의 마음을 헤아려 보다가, 강군의 진술을 의심해 보기도 합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요? 당신의 죽음 이후 경찰은 강군을 취조하며 거짓말탐지기를 사용했어요. 당신이 겪은 교제폭력은 한국의 범죄 수사에서 처음으로 거짓말탐지기를 활용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김양, 지난해 살해되거나 살해될 위험에 처한 사람 5명 중 1명은 젠더폭력을 겪었습니다. 가정폭력, 교제폭력, 스토킹, 성폭력 같은 일입니다.2 19시간마다 1명의 여성이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해 살해되거나 살해될 위험에 처하는 세상 속에서3 저는 거짓말탐지기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거짓말탐지기로 알려진 폴리그래프(polygraph)는 물증이 없는 경우에 주로 쓰이기 때문에 젠더폭력과 아주 가까운 기술입니다. 2021년부터 2023년 사이 경찰의 폴리그래프 검사를 받은 사람 중 35.9%가 성폭력 범죄 관련자였습니다.4
당신과 수많은 여성에게 향한 폭력을 심문한 폴리그래프는 어디서 왔을까요? 폴리그래프의 역사는 성/폭력의 역사입니다. 당신이 아주 어릴 때부터,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퀴어 공무원을 색출하기 위해서 폴리그래프를 활용했어요. ‘라벤더 공포(lavender scare)’로 알려진 일이에요.5 냉전이 시작되고 미국 국무부는 공산주의자와 동성애자를 함께 제거하기로 했습니다. 공산주의자와 그 동조자, 그리고 간첩 행위를 저지른 사람과 함께 “상습적 음주자, 성도착자, 부도덕 행위자, 재정적 무책임자, 전과자”는 연방 고용이 거부된다는 ‘보안 원칙’을 세운 거예요.6 여기에 ‘성도착자’가 들어가면서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국무부 정책이 되었고, 색출 과정은 개인 면담과 폴리그래프 검사로 이루어졌어요. 1955년에만 75명이 검사를 받았는데, 2명을 빼고는 모두 ‘부도덕’ 결론이 내려졌고, 그건 ‘동성애’를 의미했습니다.7 아주 ‘효과적’인 검사였어요. CIA에서 폴리그래프 검사관으로 근무했던 설리번은 “기밀취급인가가 박탈된 직원 중 대부분은 동성애자임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고 회고했어요.8 폴리그래프는 이렇게 국가적으로 섹슈얼리티를 통치하는 도구로 연루되었습니다.
이런 역사를 가진 폴리그래프는 성범죄자 관리의 방법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전자발찌와 신상 공개 등의 방법에 더해 폴리그래프 검사를 통해 재범을 예방하는 것으로, 미국과 영국 등에서는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어요. Jessica Lingel과 Heather Jaber는 성소수자와 성범죄자를 함께 다루는 것에 유의하면서도, 이러한 역사를 되돌아보며 우리 사회가 폴리그래프를 통해 ‘비정상적’인 신체에 대한 이성애규범적 공포를 제도적으로 다루어 왔다고 주장합니다.9
폴리그래프가 어떻게 발명되었는지를 알아보면 비정상성과 감정을 연관 짓는 기계라는 것이 더욱 명확해집니다. 폴리그래프의 탄생은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의 분산된 연구를 통해 이루어졌어요. 그중 범죄학자 Cesare Lombroso는 “범죄 탐지에 과학적 현상을 최초로 적용”한 인물로, 맥박과 혈압을 기록하는 장비를 활용해 실제 범죄 용의자를 연구했습니다.10 Lombroso는 우생학과 골상학을 믿으며, 범죄자는 타고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범죄자의 신체적 특징을 측정하고 연구했습니다. Lombroso의 제자였던 Angelo Mosso 역시 다양한 측정 기술을 활용한 연구를 진행했고, 인간 감정에 대해 장비를 활용한 기계적·정량적 연구를 시작한 사람이 되었어요. Mosso는 공포심과 신체 반응의 상관관계에 대해 연구하며, 폴리그래프의 기반을 마련했어요.11 폴리그래프의 핵심 논리는 바로 거짓말을 하는 행위가 두려움이나 긴장감 같은 감정 변화를 만들고, 이런 변화는 측정할 수 있는 생체 신호를 이끌어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폴리그래프는 감정인식 기술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두려움에 대한 기술입니다. 피검사자의 두려움을 읽어낼 수 있다는 확신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범죄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해결하려고 하는 기술입니다.
저는 두려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거짓을 말하는 몸에 대한 두려움은 특히 더 여성의 몸에 잘 달라붙습니다. 왜 성범죄 피해자의 경우 다른 범죄보다 더욱 그 피해 여부를 의심받기 쉬울까요? 다시 돌아가서, 2021년부터 2023년 사이 경찰의 폴리그래프 검사를 받은 사람 중 35.9%가 성폭력 범죄 ‘관련자’였습니다. 그중 가해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피해자가 얼마나 많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피해자의 경우도 폴리그래프 검사를 받게 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폴리그래프는 감정인식 기술이기 때문에 거짓말에 대한 죄책감이나 탄로에 대한 불안이 아닌 트라우마 재경험으로 인한 공포심과 두려움에도 반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진실반응’도 ‘거짓반응’도 아닌 ‘판단 불능’으로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12
김양, 그날 저는 가지 덮밥을 점심으로 먹었습니다. 실습실로 향하는 발걸음의 무거움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절도, 폭행, 특수 상해 같은 시나리오로 실습을 해왔습니다. 무엇을 훔쳤는지, 누구를 때렸는지와 같은 질문들을 서로에게 연습했습니다. 그날이 특히 긴장되었던 것은 우리가 처음으로 성폭력 사건을 실습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검사관 역할을 먼저 했는지, 피검사자 역할을 먼저 했는지는 뚜렷하게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피검사자 차례가 되었을 때, 저는 익숙하게 그 의자에 앉았어요. 그럼에도 몸에 부착되는 센서는 수십 번째인데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몸을 살짝 조이는 감각에 내 신체의 움직임이 느껴집니다. 숨을 쉴 때마다 부풀어 오르는 상체를 지켜보며 온몸을 가만히 두려 하면 손끝까지 긴장이 됩니다. 이 의자에 앉으면 이 방의 벽지밖에 보이지 않아요. 그 벽의 테이프 자국을 쳐다보게 됩니다. 실습실은 아주 조용해서 에어컨이 웅웅대는 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검사가 시작됩니다. 움직이지 마세요.’ 정적 속에 에어컨이 다시 웅웅거립니다. 검사관 역할을 맡은 동료가 건조한 말투로 질문을 읊습니다. 그때까지는 괜찮았어요. ‘당신은 그 남자의 엉덩이를 만졌습니까?’ 그 질문을 듣자마자, 어떤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순식간이었어요. 숨이 가빠지고 머리는 어지럽고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속이 울렁거렸습니다. 저는 못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저의 첫 공황발작입니다. 진정하는 데에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는 가늠하지 못했어요. 덜덜 떨고 있는 제 몸에서 동료는 센서를 떼어내 주었습니다.
그 차트는 채점이 불가능합니다. 그날 저의 두려움을 채점하지 못한 폴리그래프가 탐지한다는 두려움이란 무엇일까요? 폴리그래프 검사를 위해서 피검사자는 적당한 조건에서 적당한 불안을 적당한 시점에 느껴야 합니다. 저의 경우 불안의 크기도 그 시점도 적당하지 않았던 거예요. 검사관은 그 적당함을 조율하는 데에 능숙해지도록 훈련을 받습니다. 이렇게 폴리그래프 기술은 장비 혼자 거짓말을 탐지하는 것이 아니라, 검사관과 피검사자의 사이를 장비가 매개하면서 채점 가능한 정동을 생산하는 기술입니다. 저는 모릅니다. 실제 현장에서는 어떻게 폴리그래프 검사가 이루어지고, 그것이 수사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채점이 불가능한, 적당하지 않은 불안을 느꼈을 다른 생존자들의 ‘판단 불능’ 결과를 상상해 봅니다. 그런 검사 결과는 수사 과정에,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김양, 강군에게 내려진 판결에 거짓말탐지기 검사 결과는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법원은 “다른 증거들에 의해 강 피고인의 범죄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며 3년 형을 내렸습니다. 강군은 이제 50대의 중년이 되었겠습니다. 저는 폴리그래프의 타당도나 신뢰도에 관해 관심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정확도’를 의심받는 지금도 폴리그래프는 법집행기관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법정에서의 증거능력이 없는데도 수사 과정에 활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김양, 당신의 죽음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요?
글쓴이 : 배채연 네덜란드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시각예술가·영화감독·연구자이다. 현재 레이던대학교 정치학연구소에서 국제정치사회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으며, 사회기술적 일상과 저항을 주제로 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시각적 참여관찰연구와 실험·다큐멘터리 포맷의 영상예술이 교차하는 방법론의 확장을 모색하고 있으며, 독립·급진·실험영화플랫폼 First Cut을 함께 만들고 운영하고 있다. https://pingping.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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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미상, “白花釀造(백화양조)술통 여고생 變死(변사) 犯人(범인)은 고교생…구속”, 경향신문, 1978. 04.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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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아·박현정·오세진, “[단독] 살인·살인미수 5건 중 1건, 젠더폭력이었다”, 한겨레, 2024. 07.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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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리, “‘법의 빈틈’에…남자친구에게 죽는 여성들”, 주간경향 1585호, 2024. 07. 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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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진, “후배 전문가 양성 나선 제복 벗은 ‘거짓말탐지기’ 전문가들”, 경향신문, 2024. 05.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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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son, David K. (2004). The Lavender Scare.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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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son 2004, p.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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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son 2004, p. 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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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llivan, John F. (2007). Gatekeeper: Memoirs of a CIA Polygraph Examiner. Washington, DC: Potomac Book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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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gel, J., & Jaber, H. (2024). Performance, Spectacle, Affect: The Polygraph’s Sexual Politics. Science, Technology, & Human Values, 49(3), 698-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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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우·조은경, (2023). 폴리그래프 검사. 서울: 동국대학교 경찰사법대학 법심리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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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n, G. C. (2012). The Truth Machine: A Social History of the Lie Detector.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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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우. (2020). 폴리그래프 검사질문 조건에 따른 성폭력 피해자의 심리생리반응 차이 연구. 한국범죄정보연구, 6(2), 259-2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