펨텍톡 | 4호 - Good Intent Beh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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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 Good Intent Beh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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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2024/4/22 00:00

『펨텍톡(FEM TECH TALK)』은 기술 문화를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보고 이를 현재의 이슈와 연결해 보는 기술 비평 진(Zine)을 지향합니다.

이번 호의 주제는 ‘Good Intent Behind’입니다. 기술과 디자인이 마치 한 쌍이라는 듯 엮이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으며 만사가 손쉬워진다고 하죠. 부쩍 편리해졌다는 경험 안에서, 이 미심쩍은 약속에 곧잘 인용되는 디자인이라는 말에 주목합니다. 매끄러운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는 좋은 의도는 누구를 위한 좋음과 의도인지, 작업 과정에서 기술과 디자인은 서로에게 얼마나 배어들어 있는지 살피고자 합니다.

편집부에 적임자를 찾아냈다는 기쁨을 주었던 김예슬의 글은 숨가쁨을 만들어내는 가치인 새로움을 다시 가늠하면서 디자인과 비평 양쪽에 안겨드는 책임을 두고, 이 얼떨떨한 무게감을 돌파해 볼 관점을 제시합니다. 이어지는 글 ‘비평문(A Critical Statement)’은 산업 디자이너의 책무에 대한 자전적인 고백인 동시에 디자인 교육자인 저자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디자인된 제품과 제품 뒤의 디자이너가 서로를 위기에 처하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묻습니다.

매호 연재되는 편집자 전유진의 기술 에세이는 더 나은 디자인을 가려낸다는 척도인 직관을 회고하며, 좀처럼 디자인으로 읽히지 않는 미세한 설계로부터 디자인과 세계가 서로에게 간섭하는 과정을 환기합니다. 다음으로 리뷰에서는 광주광역시에서 여성 지향 토이샵을 운영하는 라마의 안내와 함께 반려 가전이라 불리는 섹스토이 디자인의 기술 공학을 살펴봅니다. 글 말미에는 친절한 권유 또한 곁들여져 있습니다.

매호 소개하는 CCC의 이번 챕터는 최초의 인터넷을 만들어낸 상상이 무엇이었는지에서 출발합니다. 정형화된 문제 풀이식 엔지니어링 교육이 누락하는 세계를 지적하며, 진지한 상상을 가능하게 할 디자인으로서의 컴퓨터 과학 교육을 제안합니다. 마지막으로 십자말풀이 ‘디자인이 만든 세상’에는 세상을 바꾼 디자인이라 꼽히는 이름들 약간과 디자이너의 작업 중 익숙한 말들 요모조모를 담았습니다.

이 서문을 입력하던 태블릿 옆으로 컴퓨터를 켜자, Windows OS 로그인 화면에 공교롭게도 다음의 문구가 떠올랐습니다. “DALL-E-3를 기반으로 구동되는 Microsoft Designer를 통해 무료로 멋진 AI 이미지를 만드세요.” 이 우연은 얼마나 공들여 디자인된 현실일까요? 작년 봄 창간된 『펨텍톡』은 올해 두 번의 발간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우연 끝에 『펨텍톡』을 마주하셨을 독자 여러분의 너른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2024년 봄 펨텍톡 편집자 이다솜

목차

  1. 이상하고 낯설고 침범하며 스며드는 새로움 - 김예슬

  2. 비평문 - Sophie Thurner

  3. (에세이) 경험을 만드는 일 - 전유진

  4. (리뷰) 토이가 부릅니다. 뜨거운 안녕 - 세컨드웨이(라마)

  5. (연재) Critically Conscious Computing : CS and Design - Amy J. Ko, Alannah Oleson

  6. (십자말풀이) 디자인이 만든 세상


1 이상하고 낯설고 침범하며 스며드는 새로움

김예슬

바우하우스를 언급하지 않기, 윌리엄 모리스를 언급하지 않기. 일본의 메타볼리즘이나 시카고의 프레리 학파를 참조하지 않고 디자인에 대한 글을 쓰기. 미스 반 데 로어를 배제하기. 멤피스와 찰스 & 레이 임스를 거론하지 않고 디자인에 대한 글을 쓰기.

내가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 항상 마음에 두는 몇 가지 명제들이다. 이미 문단의 머리에서부터 이를 나열하게 되면서 결국엔 되레 트래픽을 더 부가하게 되었지만. 디자인의 종말보다 현대성(modernity)의 종말을 목격하는 것1이 더 어려운 일이기에 당분간 나의 도전은 실패를 피치 못할 예정이다. 그렇다면 이 공허한 나의 노력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나는 서구와의 단절을 통한 국수주의적 디자인 글쓰기를 하려는 것인가? 또는 ‘디자인은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비평의 무용성을 주창하는 것인가? 무엇이 되었든 (둘 다 아니지만) 이것은 디자인 글쓰기의 ‘새로움’을 추구하려는 노력이다.

새로운 디자인, 디자인의 새로움: 제품에서 경험으로

‘새로움’이란 개념은 누군가 디자인이란 키워드를 마주하였을 때 저마다 다른 분야와 기대감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공통 분모이다. 또한 모든 디자이너들이 각자의 프로젝트 앞에서 넘어야 할 암묵적 과제이다. 그것이 RISD2의 한 졸업생이 제작한 인류사에 기록될 197만 번째 의자든, 투자자들의 기대에 공허히 응답하기 위한 스페이스X의 크루 드래곤에 사용된 스크린 인터페이스 디자인이든 말이다.3 이러한 기대감은 디자인이란 본질적으로 왕년에 ‘아방가르드’라고 불리던 어떤 대사활동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이런 의미에서 ‘새로움’이란 개념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예나 충격이 전달하는 ‘신기함’이나, 마크 로스코의 작품 앞에서 느껴지는(느껴진다고들 하는) 영속적인 ‘숭고함’과는 층위를 달리한다. 그보다는 형식, 또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고유성(originality)으로서, ‘저 스타일은 메종 마르지엘라의 문법이다.’ 따위의 문장에서 드러나는 일종의 ‘구별하기’를 뜻하는 것이다.

이렇게 봐서는 디자인의 새로움이란 일견 뛰어난 개인 또는 다수의 독특한 취향의 형상화, 또는 그에 순수하게 반응하는 인지와 경험으로 설명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산업화와 더불어 소비를 촉진/순환하기 위한 기업의 전략으로 채택되어 진화해 왔다. 다시 말해 현대문명과 그의 강력한 협업자인 세계화가 직조해 낸 감각에 더 가까운 것이다. 고유성을 추구하려는 각자의 노력은 디자인이라 불리는 추상적(경험)이거나 구체적(수행)인 요인을 통해 실현되었다. 24개월마다 반도체 집적회로의 성능이 2배로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이 단지 기술의 급격한 발전을 뜻하는 은유적 장치가 아니라 매년 교체되기를 기다리는 내 손안의 작은 제품으로 대변되었던 때가 있었다. 그 흥분과 기대는 기업들의 신제품 발표회, 블로거들의 언박싱, 리뷰 영상을 밤새워 좇아보던 에너지로 전환되었다. 그 시기 새로움의 의미란 기술의 혁신과 상응하는 것이었다. 형태의 유사성에 대한 논쟁으로 시작하여 7여 년간 진행된 두 거대 기업의 특허 소송전4은 ‘모양새’가 더 이상 고유성의 전략이 될 수 없으며 새로움의 축이 ‘경험’으로 이양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 새로움을 대변하는 전략으로서 ‘경험’이란, 사용자들이 까다로움과 곤란함을 겪기보다는 편리한 방향으로, 고립되기보다는 연결되도록, 장벽에 가로막히기보다는 모두에게 접근하는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디자이너의 노동은 스케치에서 프로토타입 제작으로, 그리고 대상과 대상을 연결하는 경험으로 넘어왔다. 근래의 프로덕트 디자인은 무형의 서비스, 경험, 행동 양식, 문제 해결 등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것으로, 즉 (예비) 사용자의 시야에 포착되는 과정부터, 쓰임을 다하여 손(또는 기억)을 떠날 때까지 모든 단계를 세심히 설계하는 범주까지 확장되었다. 언뜻 들어서는 디자인마다, 경험의 단계마다 다각도의, 다층적인 새로움이 출현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모든 것들이 공공연하게 ‘좋은 디자인’이란 문법을 갖춘 채로 평준화된 듯하다. 왜? 앞서 언급한 경험 디자인의 실천적인 요인 ‘편리,’ ‘연결,’ ‘접근성’ 등은 직관성으로 오해되기 쉬운 반응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돌이 갓 지난 아기가 아이패드의 애플리케이션을 숙련 없이 곧잘 조작하는 것을 목격했을 때 아이의 잠재된 영재성을 속단하기 이전에 ‘유니버설한 사용성’을 구축한 디자이너의 노고를 찬양해야 할 일인 것이다.

좋은 디자인이 특정한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의 최적화를 뜻한다면, 그것을 달성하도록 돕는, 또는 고용되는 우리(사용자)의 인지와 행위는 누구의 어떤 목표와 궤를 같이하는지, 지금의 디자인은 어떤 개념의 ‘새로움’에 부역하고 있는가를 질문해 볼 시점이다. 이 새로움을 운행하는 연료는 무엇인가? 그 새로움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 엔진을 견인하는 디자이너는 누구인가?

새로움의 지속가능성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전례 없는,’ 그리고 ‘혁신적인’이란 수식어가 달린 제품, 서비스, 디자인들이 구성하고 운행하는 세계로 시선을 잠시 돌려보자. 세상을 하나로 연결하겠다는 야심과 함께 시작된 소셜 미디어 서비스는 개인정보의 침해, 사이버 폭력, 정신 건강의 악화 등 끝도 없는 부작용을 보여주었고, 잉여 재화에 새로운 경제적 순환을 부여하겠다며 시작한 공유경제는 착취적이고 불안정한 고용으로 인한 계급 양극화의 주범이 되었다. 또한 이 모든 발전을 지지하기 위한 과잉 개발은 심각한 기후 위기, 생물 다양성 손실, 불평등, 빈곤 등을 초래했다. 새로움의 주기적인 출현이 초래한 반작용으로 곪아가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면 투기적인 방식이든 희망적인 방식이든 새로움을 찬양했던 이들의 근시안적 시야를 비판해야 하는지, 또한 이 부정적 면들을 ‘세상을 구한(할)’ 혁신적인 아이디어의 ‘피치 못할’ 부작용과 부산물로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뒤따라온다.

혁신의 여러 가지 반작용들은 ‘새로움’의 정의와 역학이 미래에도 지속 가능한 것인지를 반문한다. 새로움은 디자인에 늘 요구되는 가치이며, 현재의 행위와 미래의 결과를 연결하는 매우 구체적이며 분명하고 실천적인 인과관계로 역할하기에, 새로움에 대한 논의는 그것을 만드는 이와 사용하는 이의 위계, 그리고 그들이 합의하고 공유하는 사회적 통념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와 그것을 지탱하는 디자인의 인과관계를 비판하는 방식으로 ‘새로움’을 반문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를테면 ‘사용자 정보 설정 공간에서 성별을 선택하는 라디오 버튼의 변경이 어떻게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한 도시의 공동화로 연결되는가?’라는 질문이 지나치게 비약적이고 어리석게 보이지는 않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그리고 이 맥락에서 디자인의 새로움이란 단편적인 경험을 가속하기 위한 아주 납작해진 수행적 층위에 불과하며, 유사한 문법을 되풀이하며 스스로 내재된 취약성을 끝없이 재생산하는 하나의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이 개념의 지속가능성을 질문하기 위해 최근에 등장한 새로운 생산자의 출현-인공지능-으로 관심을 돌려 잠시 답변을 유예해 보자. 그 또한 혁신의 산물이자, 가장 ‘생산적인’ 디자이너의 출현으로 주목받고 있으니 말이다.

두 교황 이미지

이미지 생성 인공지능 서비스 미드저니(Midjourney)와 달리(Dall-E)의 베타 버전이 나왔을 때였다. 나의 타임라인은 두 서비스가 생성한 실험적 이미지로 넘쳐흘렀다. 이 ‘새로운’ 창작자의 출현은 기존의 디자인 방식과 목적에 많은 질문을 던져주었다. ‘AI의 수준이 이 정도야,’ 라는 흥분 섞인 감탄부터 ‘이제 많은 작가들이 일자리를 잃겠구나.’라는 섣부른 비관, 그리고 ‘인공지능이 기존의 일러스트를 학습 소스로 무단으로 이용하고 재생산하는 것이 포착되었다.’는 등 프로그램의 윤리적인 문제까지 다층적인 토론을 촉발시켰다. 창작자와 디자이너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나의 타임라인 스크롤은 이 새로운 창작자의 등장에 대한 걱정, 우려, 논쟁, 흥분, 기대가 얽히고설켜 끝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틈새에 사진 한 장이 내 시야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바티칸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백색의 패딩 코트를 입은 사진이었다. 때마침 겨울이었고, 교황도 추운 날씨엔 패딩을 입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새하얗고 매끈한 패딩 코트는 어두운 배경과 강렬하게 대비되어 내 시선을 잠시 끌었다. 말쑥한 옷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그의 엉거주춤한 자세와 편안한 인상도 눈에 들어왔다. 종교도 교황도 잘 모르지만, 탈권위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이라고 알려진 프란체스코 교황에게 썩 잘 어울리는 옷이라고 짧게 생각했다. 나는 스크롤을 내려 다음 콘텐츠로 금세 관심을 옮겼다.

며칠 후 나는 다른 이의 게시물을 통해 그 이미지가 미드저니로 제작된 가상의 이미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5 나는 기억을 더듬어 그 이미지가 잠시 내 시야에 들어왔던 순간을 돌이켜보았다. 내가 감쪽같이 속았다는 사실보다 스스로 그 이미지의 진위를 따질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에게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실 그 이미지도 생성 이미지의 약점(손, 안경테 등의 어색한 묘사)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에 자세히 관찰했다면 단번에 가짜로 판별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판단은 이 모든 것을 불필요하게 만들어 버린 ‘그럴싸함’에 완전히 소모되었고, 분노는 오갈 데 없이 헤매다 결국엔 애꿎은 익명의 제작자에게로 향했다. 대체 누가 이런 쓸모없는 이미지를 만들고 퍼뜨리는 거야? 왜?

나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사진을 의심 없이 믿었다는 성토가 이어졌다. 이 이미지가 의심 없이 많은 이들에게 받아들여졌던 이유는 (심지어 인공지능 생성 이미지에 대한 경각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때에도) 먼저 교황이 흰색 코트를 입었다는 사실이 딱히 주목할 만한 특별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었고, 그리고 교황이란 인물이 전통과 현대의 경계에 존재하는 합리성과는 거리가 먼 판타지적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나이 많고 권위적인 이가 그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트랜디함’을 보여주었을 때 거기엔 거부하기 어려운 우화적인 즐거움이 있기에 인터넷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었다.6

‘발렌시아가 교황’ 사진은 많은 사람들이 (미디어의 문법과 언어에 친숙한 전문가들조차) AI가 가져올 가짜뉴스나 잘못된 정보의 풍파에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진단했던 해프닝이었다. 이와는 별개로 이 사건은 인터넷에서 만나는 이미지에 대하는 나의 태도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한동안 비트로 구성된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곧 이미지의 진위 여부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명제로 내려놓고 ‘유효한 것은 이미지 그 자체의 퀄리티뿐’이라는 강박에 빠져버렸다. 불안했고 화가 났고 두려웠다. 그러나 거센 감정들이 지나간 후, 나는 이상한 해방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의 직감 또는 심미안을 거짓 뉴스와 조작된 이미지로부터 철옹성처럼 지킬 수 있으리라 굳게 믿어왔고 그 의심이 적어도 올해 일어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잘 다듬어진 가짜 정보의 예상치 못한 습격으로 나의 분별력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고, 그것은 너무나도 연약하고 무력한 것임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이는 생성되거나 디자인된 결과물의 이면의 의도를 디자이너의 관점으로 읽음으로써 구분 짓기를 노력하던 나의 윤리적, 도덕적, 판단이 이제는 새로운 감각으로 재편되어야 할 때였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림 1 : 발렌시아가 코트를 입은 프란체스코 교황 이미지

그림 2 : 생성한 유색인종의 교황 이미지

일여 년이 지나고 세상은 인공지능이 만든 또 다른 교황의 이미지로 잠시 떠들썩했다. 구글에서 개발한 인공지능 제미나이(Gemini)가 교황의 이미지를 생성하라는 지시에 아시아 여성과 흑인 교황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것이다.7 많은 이들이 이 결과물을 ‘치명적인 오류’라고 판정하고 수정을 요구했다. 어느 언론에서는 지나친 “정치적 올바름”의 추구가 결국엔 진실을 버리고 거짓을 생산하는 사태를 초래했다고 이 사건을 진단했다. 구글은 실수를 인정하고 급히 제미나이의 성능을 수정, 보완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역사상 유색인종이거나 여성이었던 교황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AI는 그 ‘자연스러움’을 거스르는 결과물을 생성해 내서는 안되는 것이 반발의 핵심이었다.

근래 인공지능에 관련된 뉴스의 헤드라인은 인공지능의 수행성, 정확성, 또는 인간다움에 대해 집중하고 있는 듯하다.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고, 까다로운 철학적 질문에 답을 하고, 이미지를 더 많이, 능숙하게 생성해 내고, 연애편지를 그럴싸하게 써내려 가는 등 명료하게 드러나는 수행성을 통해 그들의 발전과 잠재성을 예측한다. 제미나이의 해프닝은 인공지능이 학습하는 데이터 중 어느 범주의 그라운드 트루스(Ground Truth)8가 필요한지에 질문하며 더 나아가 우리가 통념으로 여기는 윤리적, 도덕적 옳고 그름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오류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방식과 언어는 그들의 세계관이 가진 협소함과 취약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상하고 낯설고 침범하며 스며드는 새로움

나는 사람들이 제미나이의 수정을 요구했을 때 아시아 여성의 모습을 한 교황, 흑인의 교황을 생성해 낸 인공지능이, 기득권, 차별, 계급, 빈곤, 격차 등 세계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 어떤 문제의식과 관점을 가지고 의사 결정을 내릴지 몹시 궁금해졌다. 그것은 인공지능의 수행성에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닌 인공지능이 (잠시나마 가졌던) 세계관으로 접근하고 싶었던 욕구였다. 하지만 이미 현실의 구조를 더 착실하게 반영하는 방식으로 수정/업데이트 되어버려 그 세계관 역시 접근 불가능하게 된 점이 못내 아쉬울 뿐이었다. 발렌시아가를 입은 교황의 이미지가 나에게 저질렀던 방식처럼 ‘말도 안 되는’ 유색의 교황 이미지들이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 의심도 받지 않고 우리의 의식을 스리슬쩍 침투하는 순간을 한번 상상해 보았다. 언젠가 그것이 정상의 범주로 여겨지는 먼 미래 또는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말이다. 그 세상의 거리감은 두 교황 이미지의 상반된 수용 정도만큼이나 멀어 보이는 것은 물론, 또 다른 비윤리적인 이미지가 도처에 널려있는 세상이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명명하는 디자인에는 더 이상 새로움을 허용하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정의하고, 분절하며, 위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언어로서, 오늘도 토글 버튼과 메뉴바와 로그인 버튼, 그리고 프롬프터 창은 세계를 지탱하는 변치 않는 가치관을 더욱 강화하는 구성요소가 되었다. 디자인의 새로움이 우리가 학습한 평균이라고 여겨지는 통념과 인지에 기반하여 설계되는 것이라면, 새로운 주체가 등장하여 제시할 ‘예측 불가능한 낯섦’과 ‘통념에 벗어나는 이상함’을 어떻게 다루고 맞이해야 할까. 더 이상 ‘전례 없고,’ ‘혁신적인’ 고유성을 좇는 새로움이 아닌 이상함, 낯섦과 어울리고, 대화하고, 반문하는 ‘새로움’이 디자인, 또는 디자이너가 마주해야 할 다음 단계의 ‘새로움’이라 정의하고 싶다.

그 이상함이 초대하는 새로움에 스며들다 보면 언젠가 무모하게 느껴졌던 몇 가지 질문들, 구획을 나누고, 분류하고, 쪼개고, 구분하고, 정의하는 방식으로 설명되지 않던 인과관계들, 예를 들어 새로운 활자체의 응용과 거리로 나서 금지된 구호를 외치는 용기 사이의 상관관계를 설명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해제하는 언어를 발견하고 다듬는 새로운 디자인 글쓰기에 한 걸음 다가가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글쓴이 : 김예슬 (Raey Yeseul Kim)

디자인의 정치성, 그리고 사회적, 구조적 영향력을 다각도로 비평하기 위한 글쓰기와 만들기를 하고 있다. 현재 네덜란드 델프트에서 디자인과 육아, 그리고 모성애의 관계를 탐구하는 ‘디자인과 육아(Design and parenting: the products that shape parenting, childcare, and motherhood)’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다.

ryk.me
myriadworld@gmail.com


  1. Fredric Jameson의 유명한 경구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 (it’s easier to imagine an end to the world than an end to capitalism).”를 차용하였다. ↩︎

  2. 미합중국의 어느 저명한 디자인 교육기관. ↩︎

  3. 스페이스X는 페이팔,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설립한 미국의 민간 우주기업이다. 스페이스X의 크루 드래곤은 민간 유인 우주선으로서 최초로 지구의 궤도에 진입한 후 귀환에 성공했다. 크루 드래곤을 조종하는 대형 LCD 터치스크린 인터페이스는 기존 우주비행선의 아날로그 계기판과 대조되는 새로운 디자인으로 주목받았다. ↩︎

  4. 애플이 삼성을 상대로 제품, 기능, 인터랙션 구성요소의 유사성과 특허 침해를 제기하며 시작된 소송. ↩︎

  5. 이 이미지는 발렌시아가 교황(Balenciaga Pope)이라는 이름과 함께 레딧(Reddit)에 처음 게시되었다가 여러 소셜미디어 매체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

  6. Why Did ‘Balenciaga Pope’ Go Viral? ↩︎

  7. Is Google’s Gemini chatbot woke by accident, or by design? ↩︎

  8. 알고리즘 또는 모델의 정확성을 평가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실로 간주되는 정확한 정보나 데이터를 의미한다. ↩︎